한국의 역사에 대해 시작하기에 앞서 모든 역사, 그 이전부터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기록되어 전해지는 역사 이전의 시대를 선사시대라고 하는데, 이 선사시대는 흔히 크게 4가지로 구분합니다.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초기 철기가 그 4가지입니다. 여기서도 구분 짓자면 석기를 쓰는 구석기, 신석기와 금속을 활용하던 청동기, 철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철기를 초기 철기라고 하는 이유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도 철기이기 때문에 선사시대에 우리가 학습하고자 하는 시기를 '초기'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석기 문화
이제 이 선사시대의 4가지 기준을 가지고 공부해 보겠습니다. 석기(돌)를 사용하는 시기를 더 옛날인 구석기와 새로 시작되는 신석기로 구분합니다. 과거인 구석기가 더 원시적인 방식의 생활을 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먼저 이 석기를 어떻게 사용했느냐로 구분할 수 있는데, 구석기에는 떼어낸 석기를 사용했습니다. 큰 돌에 충격을 가해 떼어진 석기 '뗀석기'를 사용했던 것이죠. 그러면 신석기는 어땠을까요? 신석기에는 이 돌을 갈아서 원하는 용도로 만들어 썼습니다. '간석기'를 사용했죠. 그래서 우리가 시험에서 '갈돌, 갈판'이라고 하면 갈아 만든 돌을 뜻하므로 신석기라고 유추할 수 있습니다. 구석기에 사용하던 뗀석기는 시기에 따라 더 자세하게 나눌 수 있는데, 구석기 전기에는 하나의 도구를 여러 용도로 다양하게 사용하였습니다. 시간이 더 지나서 중기에는 도구마다 각각의 용도에 따라 사용했죠. 그러다 후기에는 길이가 길고 뾰족하고 양 측면이 날카로운 돌날격지를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구석기에 사용했던 도구는 대표적으로 '주먹도끼, 슴베찌르개'와 -개로 끝나는 찍개, 자르개, 긁개, 밀개, 찌르개 등이 있습니다. 이 시기에도 뼈로 만든 도구(골각기)와, 불과 언어를 사용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에 비해 신석기는 돌-로 시작하는 돌보습 등의 도구와 농경 굴지구, 갈-로 시작하는 갈돌, 갈판을 사용했고, 원시 수공업을 하면서 '가락바퀴, 뼈바늘' 또한 사용했습니다.
사실 선사시대를 구분할 때 가장 중요한 점은 경제입니다. 경제를 기준으로 전체적인 것을 바라보면 모두 이유가 있는 것처럼 연결이 됩니다. 경제로 구분할 때 가장 중요한 점은 '농경의 시작'입니다. 구석기에는 농경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물고기를 잡고 동물을 사냥하고 나무의 열매를 채집하는 등으로 생활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장소에 오래 머물지 않고 이동하는 생활을 하였으며, 사는 곳도 동굴이나 바위 그늘에서 지내거나 마구 지은 집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처음 지은 집이라는 뜻인 '막집'에서 씨족 단위의 무리 생활을 하였습니다.
신석기 시대에는 농경이 시작되었습니다. 조, 피, 수수 등 잡곡을 농사짓기 시작했죠. 비록 여전히 고기잡이와 사냥의 비중이 컸지만, 이것은 큰 변화였습니다. 농사를 짓는 삶을 살려면 정착해야 했고, 이 시기 한반도에 정착한 이들은 우리의 직접적인 조상과 연결될 겁니다. 강가나 바닷가에 제대로 된 '움집'을 짓습니다. 아직 빙하기가 끝나기 전이기 때문에 춥습니다. '화덕'을 중앙에 설치하고 땅을 깊게 파서 추위를 피합니다. 이제 그들은 족외혼을 통해서 부족 사회를 형성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평등한 사회입니다. 연장자나 지혜로운 사람을 지도자를 두고 살아갑니다. 농경을 지으면서 하늘 신에 빌기 시작했습니다. 신에게 직접 닿을 수 없으니 무당을 통해서 빕니다(샤머니즘). 농사가 잘 되게 해달라고. 부족마다 대표하는 동물신이 생겼습니다(토테미즘, 동식물 숭배). 그리고 모든 사물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습니다(애니미즘).
농경을 하면서 저장/보관의 용도로 토기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석기에 등장한 토기는 없어요. 신석기의 대표적인 토기는 빗살무늬 토기이지만, 최초의 토기는 아닙니다. 최초의 토기는 이른 민무늬 토기(무늬없음)인데, 이는 청동기 시대의 민무늬 토기와 비교하기 위해 '이른'이라고 붙여 부르고 있습니다.
금속 문화
우리는 중국계가 아닌 시베리아계의 청동기 문화를 들여와서 발전하였습니다. 다만 청동은 구리와 주석이 섞인 것으로 물렀기 때문에 농경에는 알맞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청동기 시대의 농기구는 석기 농기구를 사용합니다. 청동제 농기구라는 보기는 틀렸습니다. 그 시기의 대표적인 농기구는 '반달돌칼'로, 농경이 발달하면서 벼농사를 시작한 사회에서 벼 이삭을 자르는 용도로 쓰였습니다. 그러면, 청동으로는 무엇을 했느냐. 청동기는 무기나 장신구, 의기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고조선 영역에 거친무늬 거울, 비파형 동검이 남아있습니다. 철기를 사용하고 나서야 철제 농기구(철제 보습)를 사용하면서 간석기가 쇠퇴했고, 청동기는 의기(팔주령, 쌍두령 등 방울과 검파형 동기)로만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우리 기술이 발달해서 자체 제작을 하기 시작하면서 잔무늬 거울, 세형동검, 거푸집 등이 유물로 남았습니다. 또한 청동기에는 덧띠 새김무늬 토기, 붉은 간토기, 그리고 민무늬 토기 등 다양하게 있는데, 그 중 민무늬 토기는 출토 지역에 따라 나뉘어서 불리기도 합니다. 흔히 알려진 미송리식 토기도 민무늬 토기의 한 종류인데 손잡이가 있는 특징이 있습니다. 철기에는 민무늬 토기, 검은 간 토기, 덧띠 토기 등이 있습니다.
농경 기술의 발달로 벼농사를 시작하고 생산력이 발달함에 따라 잉여 생산물이 발생했습니다. 자연스럽게 네 것, 내 것이라는 사유재산 개념이 생겼고, 점차 지배/피지배 관계가 나뉘면서 계급이 발생했습니다. 계급이 발생한 불평등한 사회에서 누군가는 지배자(=군장, 족장)가 되어 세력을 확장하였죠. 이런 지배자의 존재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무덤이 '고인돌'입니다. 그렇게 정복 전쟁이 발생하고 최초의 국가가 생겨납니다. 그것이 '고조선'입니다. 고조선에 대해서는 차후에 이야기하도록 하고, 이런 정복 전쟁을 하는 만큼 방어 시설도 설치했습니다. 둥근 고리형태로 호수를 파서 적이 건너오지 못하게 하는 '환호'와 나무로 만든 울타리를 두르는 '목책'이 있습니다.
신석기와 청동기 사이에 '중석기'를 따로 분류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 시기에 빙하기가 끝나면서 청동기의 가옥 형태가 조금 바뀌었습니다. 땅을 깊이 파서 짓지 않고 화덕도 측면에 위치하는 형태로 말이죠. 그래도 추운 건 추우니 등 뒤에 산을 두고 농사를 위해 앞에는 강이 흐르는 배산임수 위치에 취락을 형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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