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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한국사)

고대 삼국의 전성기 : 4세기 백제 근초고왕

by 하나_A 2025.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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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의 전성기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전성기라 하면 그 기준이 다소 차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영토의 확장, 정치체제의 안정, 외교와 문화의 발달 등이 종합된 시기를 의미합니다. 전성기가 온 순서대로 진행하면, 4세기 백제 - 5세기 고구려 - 6세기 신라의 순서로 이어지고 그 이후 7세기에는 한반도의 삼국(고구려, 백제, 신라) + 중국의 나라(수, 당) 사이의 많은 전쟁이 이어지다가 그 끝은 신라의 통일로 마무리됩니다.

 

그렇게 진행되는 사이사이에 다른 나라와의 동맹이나 견제를 엿볼 수 있습니다. 백제가 전성기일 때는 신라가 동맹/연합을 맺기에는 약하던 시기라 그런 부분이 없었지만, 고구려가 전성기일 때는 백제와 신라가 연합을 맺고 '나제동맹'을 이뤘습니다. 그것도 1차 이후에 백제가 크게 쇠하고 다시 한번 결혼동맹으로 2차를 맺습니다. 나제동맹 뿐 아니라 왜나 가야와도 연합을 하기도 합니다. 고구려가 중국의 남북조와 교류하며 서로 견제하기도 하구요. 신라가 전성기일 때는 조금 애매합니다. 신라가 날리는 시기였다면 고구려와 백제가 편을 먹어야 하지 않나 싶지만, 이 때는 아직 백제와 신라의 연결고리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백제가 배신을 당하면서 온전히 신라가 판권을 잡기 시작했고 이후에 7세기 즈음 되어서 고구려와 백제가 연합하는 '여제동맹'을 맺기도 했습니다.

 

 

7세기까지 가면 내용이 넘칠 것 같으니 4세기에서 6세기까지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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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의 주요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고구려, 백제, 신라 세 나라 왕의 재위기간을 기록하여 어느 왕들이 재위시기가 겹쳤는지 확인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시기순으로 적을까 하다가 나라를 구분해서 적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 메인으로 백제를 먼저 적고, 고구려와 신라 그리고 가야 이야기를 조금 하겠습니다.

 

 

백제 전성기 : 4세기

 

 

백제의 전성기는 조금 특이합니다. 보통 앞서 말씀드렸던 중앙집권국가로서의 특징인 3가지를 갖추고서 전성기가 오는데 백제는 전성기가 먼저 오고 이후에 불교를 받아들이는 국가입니다. 그리고 전성기가 끝나면서 국가의 기운이 쇠할 때 나라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서 정비를 하는 형태를 띄고 있습니다. 

 

 

4세기 중반,

제13대 근초고왕(재위기간 346~375)은 백제를 가장 강성하게 만든 왕입니다. 마한을 완전 정복하여 전라도 지역까지 지배권 확장하면서 드넓은 곡창 지대를 확보하였습니다. 또한 중국 동진과의 외교도 활발하게 진행하며, 중국에서 들여온 선진 문물을 가야에 전파하며 가야에도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등시 왜(일본 규슈)와의 외교·문화 교류가 활발하였는데 그 증거로 태자가 칠지도를 하사하러 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직기를 통해서 한자를 전파하고, 왕인이 논어·천자문을 전파하여 일본 문화에 많은 기여를 하였습니다. 이는 일본 역사서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동진·백제·가야·왜를 잇는 무역과 외교의 중심지로서 한반도 중서부에서 확고한 패권 장악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 황해도를 둘러싸고 고구려와 대결하였는데, 371년에 평양성 전투에서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켰습니다. 이렇게 강력한 왕권을 가지고 나라가 빛을 발하는 시기를 역사서로 남겨야죠. 박사 고흥에게 <서기>를 편찬하게 하였습니다. 이 시기의 백제는 왕위 세습을 부자 상속제로 하는 등 정치적으로도 체계화되었고, 불교 수용 이전이지만 문화적으로 활발한 시기였습니다.

제14대 근구수왕(375~384)

제15대 침류왕(384~385) 때 동진에서 건너온 승려 마라난타가 불교를 전래하여 수용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해 겨울 사망하였고 태자가 너무 어려 동생이 다음 왕위를 이어 진사왕이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도 고구려(고국양왕)와 자주 싸웠는데 계속 패하면서 많은 성들을 빼앗겼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구려

4세기 초에 등장한 제15대 미천왕(재위기간 300~331)은 서안평을 점령, 대동강 유역의 낙랑군을 정복(313)하여 한사군의 잔재를 제거하고 한반도 중부로 세력을 확대하는 데 성공합니다. 이로써 고구려는 한반도 북부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게 되었고, 대외적으로도 위진남북조와 교류를 시작합니다.

제16대 고국원왕(재위기간 331~371)은 요동 진출을 시도하다 전연의 공격으로 환도성이 함락되는 위기를 겪고, 백제와의 전쟁(평양성 전투)에서 근초고왕에게 전사하는 치욕을 겪으며 일시적인 약세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제17대 소수림왕(재위기간 371~384)은 나라의 커다란 위기 속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밖으로는 백제를 견제하기 위해 중국의 전진(북조)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고, 신라와 교류하는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안으로는 체제를 정비하였는데, 율령을 반포하고 전진의 순도를 통해 불교를 수용하였으며 최초의 국립 대학인 태학을 설립하였습니다. 이렇게 흩어진 국력을 모아 내부를 바로 세웠습니다. 

제18대 고국양왕

이러한 노력으로 5세기가 시작되기 전, 4세기 말에 고구려에 전성기를 가져올 왕이 나타나고, 복수가 시작될 예정입니다. 다음 글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신라

신라 제17대 내물마립간(재위기간 356~402)은 일단 광개토대왕이 나올 때까지는 중요하게 언급할 부분이 없기 때문에, 다음 글에서 자세하게 쓰도록 하겠습니다.

 

 

 

 

가야는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해안 지역의 가야들을 중심으로 전기 가야 연맹이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지금 이야기할 내용은 아니고 다음 글에 고구려의 전성기와 함께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 여기서는 생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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