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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고려의 이야기로 들어가겠습니다. 좀 더 세밀한 체제나 문화사를 제외하고 진행하니 벌써 고려까지 왔네요.
고려 태조왕건의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틀을 잡고 시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고려는 크게 전기 후기로 나누는데, 이를 나누는 중요한 사건이 무신정변입니다. 무신정변은 기존의 고위 관료들을 모두 제거하고 새로운 체제가 정립된 사건인데요. 이 사건을 기점으로 우리는 고려 후기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무신정변이 일어난 이유는 여러 복합적인 배경이 있기 때문에, 조금 더 시간을 두고 나누어 봐야 합니다. 그래서 전기 후기로 나누어서 고려에 관한 내용을 포스팅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어떻게 흘러가는 지를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려는 건국 초기부터 바로 완성된 나라는 아니었고, 중앙 정부와 지방의 정비, 관리 등용 등을 통해 차츰 나라의 틀이 잡혀갔습니다. 초창기에는 제도 정비가 이루어졌고, 이를 고려 초기라고 부릅니다. 이 시기에는 주로 태조 왕건 같은 중요한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태조는 호족들이 지배하던 고려 초기의 정치 체제 아래에서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때 왕권은 매우 불안정했지만, 점차적으로 왕권이 안정되어 가면서 나라의 기틀이 정비되었습니다.
왕권이 안정되기 시작한 시점에는 성종이나 현종 같은 중요한 왕들이 등장하면서 국가의 제도가 점차 완비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왕권은 안정되어, 호족들은 점차 중류 귀족으로 변모하게 됩니다. 이 호족들이 귀족화된 결과, 바로 문벌 귀족 사회가 형성되었죠. 문벌 귀족 사회는 문종 왕 때 절정을 맞았고, 이 시기의 귀족 사회는 정치적, 사회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문벌 귀족 사회는 시간이 지나면서 내부 갈등이 심화되었고, 대표적으로 인종 시기에는 여러 갈등이 나타났습니다. 예를 들어, 이자겸의 난이나 묘청의 난 같은 사건들이 그 예입니다. 이런 갈등들이 심화되면서 문벌 귀족 사회는 점차 무너져 갔습니다.
그리고 그 후, 무신들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는데, 이는 무신정권 시대라고 부릅니다. 이 시기의 특징은 바로 왕이 아니라 무신들이 실질적인 권력을 쥐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중요한 인물로는 최충헌이 있습니다. 최충헌은 왕을 바꾸는 데 능했던 인물로, 왕권은 사실상 무신들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이 무신정권 시대는 왕과 귀족들이 갈등을 겪는 중요한 시기였죠. 이후, 고려는 몽골과의 전쟁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몽골의 침략이 심해지면서, 고려는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게 되었고, 이 사건을 통해 개경 환도가 이루어졌습니다. 개경 환도는 사실상 무신정권의 종말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이후 고려는 몽골의 간섭을 받게 되며, 권문세족들이 등장합니다. 이 권문세족은 몽골의 지배를 받으며 귀족화된 인물들이죠.
원나라의 간섭이 심화되면서, 충렬왕과 충선왕 같은 왕들이 등장했지만, 이들은 사실상 몽골의 강력한 통제 아래에서 개혁을 추진하는 데 한계가 있었습니다. 결국, 몽골이 무너지면서 고려는 새로운 왕권을 찾고자 했습니다. 그 결과 공민왕이 등장하게 되죠. 공민왕은 국가의 개혁을 꿈꾸며 새로운 지배층을 형성하고자 했습니다. 이 시기에는 신진사대부가 등장하면서 새로운 정치 세력이 형성되었고, 이들은 최영이나 이성계와 같은 새로운 무인들과 손을 잡고, 결국 고려를 넘어 새로운 국가, 조선을 세우게 됩니다. 이 모든 과정은 결국 고려 시대가 끝나고, 조선 시대가 시작되는 전환점을 이룹니다.
고려시대의 큰 흐름은 이렇게 네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고려 초기로 제도의 정비가 이루어진 시기, 두 번째는 문벌 귀족 사회가 형성되고 쇠퇴하는 시기, 세 번째는 무신정권의 시대, 마지막은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가 등장하여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과정입니다. 이제 각 시기를 더욱 세부적으로 살펴보면서, 고려의 정치적 변화와 그 영향을 분석할 수 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세부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태조
태조(왕건, 연호 천수)는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세운 인물입니다. 이 시기의 주요 과제는 아무래도 호족의 통합과 민심의 수습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 먼저 태조는 조세를 수확량의 1/10을 징수하는 것으로 감면했습니다. 또한 흑창이라는 빈민 구제 기관을 설치하였습니다.
지방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호족을 통합하기 위해서 혼인 정책과 사성 정책을 시행하였습니다. 다수의 호족과 혼인 관계를 맺고, 성씨를 내리면서 중앙권력을 확립하려 하였습니다. 거기에 사심관 제도를 두어 일정한 자치권을 부여하면서도 연대책임이라는 견제책 또한 마련하였습니다. 그리고 통일 전쟁에 기여한 공신들에게 공훈에 따라 역분전이라는 토지를 지급하였습니다.
이렇게 내부를 바로 세우면서 북진 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임을 강조하면서 서경을 중시하고, 청천강에서 영흥만에 이르는 국경선으로 영토를 확장하였습니다. 또한 발해 유민들을 수용하고,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에 대한 강경 정책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관리를 대상으로 하는 <정계>, <계백료서>와 후대 국왕을 대상으로 하는 <훈요 10조>를 남겼습니다.
다만, 호족 통합을 위해 했던 지나친 혼인 정책이 왕권 불안정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광종
광종(왕소, 연호 준풍/광덕)은 태조가 세운 기초 위에서 왕권을 안정시킨 중요한 왕입니다. 특히 왕권 강화를 위해 노비안검법을 시행하여,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들을 풀어주고 양민으로 만들어 국가 재정과 군사력을 강화하려 했습니다. 또한 기존의 골품제를 폐지하고, 쌍기의 건의로 과거제를 시행하여 능력 중심의 관료 시스템을 구축하고, 신구 세력의 교체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였습니다.
고려가 연호를 쓴 마지막 시점은 광종 때입니다. 그런데 광종이 연호를 쓴 건 송나라와의 외교 때문에 사실 연호를 못 쓰게 되었죠. 그러니까, 광종 때 연호는 마지막이었다는 게 포인트예요. 하지만 국왕을 황제라 칭하고 개경을 황도로, 서경을 서도로 부르면서 황제의 나라를 자처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경종이 전시과를 실시하였습니다. 시정 전시과라는 이름으로 시행되었는데, 중앙 관리들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제도로 지(밭)와 시지(뗄감)의 수조권을 나누어 주어 왕권을 강화하고 국가의 재정적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이렇게 광종의 정책으로 왕권은 안정되었고, 후에 그의 아들 경종 때 전시과가 시행되면서 국가의 기반이 정비되었습니다.
성종
성종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국가 정비에 나서게 되죠. 그래서 성종은 선대 왕들의 좋은 점을 계승하고, 잘못된 점을 극복하겠다며 신하들에게 평가를 하라고 명령했어요. 그 글이 6두품 출신의 최승로가 쓴 책 <5조정적평>으로, 광종에 대해 많은 비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시무 28조를 지어 성종에게 바칩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정치적 이념을 담고 있는데, 정치에 대한 깊은 통찰과 함께, 불교와 유교의 관계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다루고 있어요. 불교는 수신의 근본이고, 유교는 치국의 근본이라고 강조되어 있어요. 즉, 불교로 개인을 수양하고, 유교로 국가를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면서 국가 행사였던 연등회·팔관회를 축소(이후에 폐지)했습니다.
그리고 광종 때 시행했던 노비안검법과 반대로, 노비환천법을 시행했습니다. 태조 때 설치했던 흑창을 의창으로 개칭하고 상평창을 설치하였습니다.
고려의 중앙 정치 체제는 성종 때 정비되었습니다. 특히 중추원과 삼사는 송의 영향을 받았고 2성 6부제의 틀은 당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도병마사와 식목도감은 고려 고유의 제도로 중앙 정치 체제의 핵심적인 부분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또한 최초의 화폐인 건원중보(철전)이 이 시기에 주조되었습니다.
전기 후기로만 나누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내용이 많아져서 초기까지만 먼저 쓰도록 하겠습니다. 성종 이후는 다음 글에서 진행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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